글쓴이; 전재성님
3. 빠알리 니까야의 특성
1) 빠알리 니까야의 심오한 깊이
불교의 세계관은 호한하고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대승경전 가운데는 심오한 불교의 우주관을 찬란하게 묘사한 경전들은 많지만 인간의 실존적 깊이에 대해 시공간적으로 니까야처럼 심도 있게 진술하고 있는 경전은 없다.
아함경에도 나오지 않는 경전 가운데 한 예를 들어보자.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와 사대양에 있는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으로 미루어보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잘 알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물소로 태어나 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양으로 태어나 양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염소로 태어나 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사슴으로 태어나 사슴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닭으로 태어나 닭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7)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길섶에서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부녀자를 약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위의 경전을 마루어 보건대 부처님의 동체대비의 사상은 단순히 깨달음에서 나오는 형이상학적인 추론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랜 세월을 유전윤회하면서 우리 자신이 바로 도살되는 소였고, 염소였고, 목이 잘리는 도둑이였고, 부녀자를 약탈하던 파렴치범이었다.”는 실존적이고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자각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한 경전 속에 모든 인간과 환경과 사회문제와 거기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깊은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다. 현재 경불련에서 주최하는 경전읽기 모임에서 10여 명의 참가자와 이 경전을 읽었을 때에 아주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경전이기 때문이었다.
한 참가자는 윤회에 관해서 믿을 수 없다는 견해를 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실존에 관해 무지하다. 불교에서 윤회는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영원주의와 죽으면 끝이라는 식의 허무주의를 조심스럽게 배격하는 중도적인 윤회를 선택하고 있고 윤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에 방황하는 현대철학이나 과학의 항해도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환경론자들의 현대문명에 대한 각종 통계수치를 살펴보면 인류는 지구에서 단시일 안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타종교에서처럼 인간의 영혼의 영생을 믿어 현실을 외면한 채 죽은 후에 절대자의 오른편에 앉아 영생하길 바랄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멸망하는 지구 위에서 죽은 다음에는 끝이므로 물질적인 쾌락을 최대한으로 누리고 가용자원을 다 소모하고 사라질 것인가? 둘 다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오늘의 삶이 어제의 우리의 삶과 다르면서 지속하듯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인류가 멸망한 후에도 윤회하며 지속하는 삶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는 결코 윤리적인 삶을 선택해야 할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윤회는 오히려 지구를 멸망으로 이끄는 경향을 바꾸는 기술과학의 항해도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참가자는 이 경전을 읽고 우리는 항상 사소한 일에 매어 고통을 당하는데 여기 이 경전에서는 무량한 겁으로 관통하는 죽음이라는 우리의 실존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방대하고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사소한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확실히 죽음의 문제는 윤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죽음이야말로 완전한 적멸이라고 볼 때에는 완전한 열반에 든 자만이 죽은 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윤회란 지속적인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의 한 수행자가 말했듯이 역사상 죽은 자는 석가모니 한 분밖에 없는지 모른다는 등의 재미있는 담론이 오고갔다.
윤회의 문제는 그것이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정서적으로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의 삶과 환경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세계관이다. 단지 그것이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어떻게 유전윤회하는지를 살펴보면 되는 것이다.
2) 빠알리 니까야와 자율적인 윤리
대승불교의 사유가 우주적이라고 한다면 빠알리 니까야의 사유는 심오하지만 일상적이고 윤리적이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만큼 일상적인 사유 속에서의 준거틀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가르침만이 원천적으로 우리가 모든 고통 속에 빠지기 전에 사전에 예지적으로 우리를 그러한 미래적인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인도에는 불교 이전의 베다철학에서는 주술적인 찬탄과 기원이 그들의 신앙생활의 전부였다. 우파니샤드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아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고 카르마를 중심으로 한 윤리적인 사상의 맹아가 싹트게 되었다. 인류역사상 형이상학을 배제한 순수한 윤리체계가 신앙화된 것은 바로 이 우파니샤드와 동시대적으로 성립한 초기불교에서였다.
초기불교는 유신론적인 모든 다른 종교나 무신론적인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자명하고 명증적인 자율적 윤리체계를 확립하였다. 불교 윤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인간 자신의 명증적인 인식―악은 스스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를 해치는 것이다.―에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윤리적 인식에 토대가 되는 것은 상호의존하는 세계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다. 따라서 참다운 불교의 신앙은 주술적인 믿음이 아니라 윤리적인 통찰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 당시의 초기불교에서 불교는 가족 내부에서 바라문적인 종교적인 의례를 갖지 않았다. 바라문교는 인생의 중대 시기에 항상 주술적인 종교의례를 행했다. 즉 출생·명명(命名)·입교·결혼·사망시에는 제의를 행했다.
그러나 붓다는 원칙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을 미신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예를 들면, 마하나마라고 하는 샤캬 족의 사람이 붓다에게 “제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쌍윳따 니까야에서 말했다.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말게. 그대의 죽음은 악하지 않다. 그대의 임종은 나쁘지 않다. 육신이 4원소로 되어 있고 부모에게서 생겨났으며, 음식과 죽으로 길러진 것이고, 무상한 것으로 마멸하고 괴멸하고 파멸되는 것이며, ……여러 가지의 생물들이 먹어치우더라도, 오랫동안 신앙을 닦고 계행을 닦고, 학문을 닦고, 놓아버림을 닦고, 지혜를 닦았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고양되어 탁월한 곳으로 간다.” 그러나 남방에서는 호주(護呪:paritta)라는 민속적인 주문을 경전의 모음집에 포함시켜 집을 새로 짓는다든지, 장례를 지낸다든지, 질병을 앓을 때에 호주의례를 행해오는데, 이들 가운데 중요한 호주는 다름이 아니라 지송경(持頌經)의 경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붓다는 한 제자에게 ‘뱀의 축복’이라는 주문을 가르쳤는데 내용은 뱀에게 ‘자비의 마음이 스며들게 하기 위한(mittena cittena pharitum)’ 진언(붓다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을 신앙화하여 일상적으로 주문처럼 지송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허용되었던 것 같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들에게 삶은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죽이지도 말라.”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기복적인 어떠한 주술보다도 우리를 정신적인 힘과 평안으로 이끄는 보다 깊은 신앙으로 초기불교도들에게 구전되어 살아 있는 우리의 존재의식으로 내재화되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이러한 가르침이 경전화되어 단지 이해의 대상이 되었을 뿐, 신앙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주술적인 기복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가르침이 죽어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온 가족의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생명의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부처님의 말씀을 신앙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고통을 싫어하나이다. 그들에게도 삶은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들 속에서 저 자신을 인식하오니 괴롭히지도 죽이지도 않겠나이다.”
3) 탁월한 비유를 통한 가르침
빠알리 니까야는 모든 가르침에 관해 아주 적절하고 구체적이고 탁월한 비유로 가득 차 있다. 그 비유는 단지 교리와의 논리적 연관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시적이고 일상적이며 우리의 명상이나 수행 속에서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추상적이고 언어적인 사유를 모두 구체적인 그림으로 끌어내어 비유로서 한 번 더 설명하는 것이 빠알리 니까야의 특징이다. 상당히 난해하고 추상적인 12연기에 관해서도 많은 비유가 있지만 그 한 예로 물의 흐름에 관한 비유를 들어보자.
수행승들이여, ‘연기는’ 마치 무거운 빗방울이 산 위에 떨어질 때 물이 밑으로 흘러서 산의 계곡·협곡·지류를 이루는 것과 같고, 산의 협곡·계곡·지류를 이루고 다시 작은 못을 이루는 것과 같으며, 작은 못을 이루고 다시 큰 못을 이루는 것과 같고, 큰 못을 이루고 다시 작은 강을 이루는 것과 같으며, 작은 강을 이루고 다시 큰 강을 이루는 것과 같고, 큰 강을 이루고 다시 큰 바다, 대양을 이루는 것과 같다.8)
이것은 인과연쇄를 물의 흐름으로 비유한 것이다. ‘빗방울→계곡→협곡→지류→작은 못→큰 못→작은 강→큰 강→바다’가 형성되는 것처럼 연기관계에서도 인과적인 과정의 흐름이 발견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무명의 물방울이 생로병사의 바다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탁월한 비유이다.
또한 빠알리 니까야는 악업을 저질러도 현세에서 잘 살고 있고 착한 사람이 오히려 고난을 받게되는 현실적 모순과 업보의 다양성에 관한 난해한 질문도 소금물의 비유로서 간단하게 해결한다.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그러나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똑같이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바로 이 생에서 감수되고 경험되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9)
“수행승들이여, 한 사람이 한 줌의 소금을 발우의 적은 물 가운데 던진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행승들이여, 그 발우의 적은 물은 그 한 줌의 소금으로 짜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되지 않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왜 그러한가?”
“세존이시여, 발우 가운데 그 물은 적습니다. 물이 그 한 줌의 소금에 의해서 짜져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수행승들이여, 한 사람이 한 줌의 소금을 갠지스 강에 던진다고 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행승들이여,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한 줌의 소금으로 짜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세존이시여, 갠지스 강의 물의 양은 많고 그 한 줌의 소금으로는 짜져서 마실 수가 없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그러나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똑같이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바로 이 세상에서 감수되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10)
그밖에도 빠알리 니까야에는 불교의 모든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과 비유를 갖고 있다. 최근에 쌍윳따 니까야에서 탐진치와 열반에 대한 아주 놀라운 비유도 발견했다. 나그네가 집을 떠나 긴 여행을 하다가 늪지대를 지나 험준한 산맥을 넘고 다시 사막을 지나 푸른 평원에 도달한다. 그때에 늪지대는 탐욕을 상징하고 험준한 산맥은 성냄을 상징하고 사막은 어리석음을 상징하고 푸른 평원은 열반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각주 7) ga-magha-ta, pa-ripanthaka, parada-rika:17, 18, 19의 도둑들은 마을의 약탈자와 노상강도, 가정파괴범을 말한다. 8) SN. II. p.32. 9) AN. I. 249. 10) AN. I.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