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두 가지 법문이라고 제목은 달아보았지만
이렇게 딱 정해놓아도 좋을지는 걱정스럽습니다.
그래도 뭐.... 일단 제 짧은 설명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세간법문' 입니다.
세간 -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그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를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십이처설과 업설이 해당합니다.
수명님의 질문에도 답을 달았습니다만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 세간법문에 만족하며 지냅니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 이 세상....
그냥 남 피해주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면서 살아가도 그게 어딥니까?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에게 세간법문까지만 설하신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괜한 '번뇌'니 '집착'이니 이런 말씀 늘어놓아서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힘들게 하지 않으셨단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시 재래의 종교가들이 주장했듯이 선업을 부지런히 닦아서
천상에 나기를 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천상에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업'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아가본 사람들 중에
뜻하지 않은 커다란 괴로움에 부딪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또는 힘들여 벌어놓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날리거나
하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온 세간에 대해서
짙은 회의를 품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회의가 무르익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세간을 벗어나는 법문을 설하십니다.
그것이 불교의 두 가지 법문 중에 두번째인 '출세간' 법문입니다.
따라서 출세간 법문은
우리가 그토록 당연하게 여겨왔던 세간에 대한 냉정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십이처 가운데 6근이
과연 뭘로 이루어졌고
어떤 성격을 지녔기에
그렇게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자꾸만 덧없이 무너지느냐....
그것은 바로 문제의 분석을 통해서만 그 이유를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6근과 6경을 분석해 들어갔고
그리하여 12처는 지, 수, 화, 풍 이라는 네 가지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색온과
그러한 색온을 '자기'(엄밀하게 말하면 하나의 생명체)로서 지속시키려고 하는 정신적인 작용(노력)의
수, 상, 행, 식온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근본요소(근간)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게 된 것입니다.
십이처와 오온은 이렇게 차원이 다른 법문인 것입니다.
오온이나 십이연기와 같은 법문들은 모두 출세간법문입니다.
무너지는 속성을 지닌 세간을 제대로 바라보려고 분석해들어가서
우리들이 그토록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는 무엇이었는지를
밝혀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구조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존재에 흐르는 법칙이 찾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깨닫는다'고 외치는데 대체 뭘 깨닫는 것일까 궁금한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존재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이 이치(이법, 진리, 다르마)를 깨닫는 것입니다.
존재를 분석해들어가고 그 이치를 진실하게 바라보는 과정은
참선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한 참선을 지속시켜 나가다보면
숱한 번뇌들(마음의 어지러운 작용들)이 한꺼풀씩 벗겨집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어리석음을 완전히 없애버리면
즉 존재에 대해 완전히 해박하게 통찰하고 나면
해탈하게 되는 것이고 그가 바로 아라한인 것입니다.
지금 <불교의 체게적 이해>를 읽어가고 있는데
지난 수요일 그러니까 4월5일에 읽었던 부분은
바로
세간법문에서 한 차원 건너뛴 출세간법문의 시작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라면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린 "왜 종교생활을 하는가, 왜 부처(또는 신)를 믿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체로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잘 되길 바라서"라는 대답을 흔히 합니다만
행복하게 이 세상을 잘 살려면
절에 가서 기도한다고, 교회가서 빈다고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 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 그 이치에 따라 행복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잘 산다'는 말은 즐겁고 행복하다는 뜻이고
그와 같은 즐거운 결과를 맞이하려면
그 결과를 초래하기에 적합한
착한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원리이고 이치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이치에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칩니다.
그런 한계에 부딪쳤을 때
그 사람이 종교적으로 더 나아가느냐
아니면 그냥 현실에서 그 한계 안에서 수긍하고 사느냐.....
종교는 그럴 때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지적으로 성숙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적으로 지적으로 성숙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진짜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실을 잘 살아가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 종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습니다만
현실의 한게에 부딪쳤을 때 비로소 종교의 바른 쓰임이 시작된다고 해야
그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두 가지 차원의 법문
그것은 바로 세상을 행복하고 올바로 살아가기 위한 세간 법문과
세간의 한계를 뚜렷하게 인식시켜서 그 한계를 넘어서 영원한 가치를 안겨주기 위한 출세간 법문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미령 드림 _()_
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