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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의 성격 2

writer : 지봉 날짜 : 2014-09-22 (월) 14:41 hits : 706


선에서는 흔히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친다는 대의대오(大疑大悟)를 말한다. 인생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깊어지면 깊어지는 만큼 공안에 대한 관심은 깊어지고, 또한 완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사색 탐구가 엄밀하게 이루어지고 그 행위의 귀결이 분명해질 때야말로 현실과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모든 성질의 색다른 깨침의 경지의 존재가 유일한 가치가 되리라는 희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공안은 단순히 깨친 자의 심경을 나타내는 말과 행위에 그치지 않고 아직 깨치지 못한 자의 마음을 사색의 심연에 이르게끔 분발시켜 깨침의 경지에 나아가는 매개 작용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안 자체를 두고 깨침으로 나아가는 단순한 수단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공안은 깨침을 얻기 위한 도구로 출발을 한다. 그러나 공안을 참구해 나아가는 수행의 과정은 결코 깨침과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제1단계에서는 내가 있어 공안을 참구한다.

그래서 나는 나이고 공안은 공안이어서 나와 공안이 별개로 존재한다.

그러나 점차 공안 수행이 깊어짐에 따라 제2단계에서는 공안을 참구하는 내가 공안이 되고 공안이 내가 되는 경지, 곧 화두일념이 된다.

여기에서는 단순히 공안이 참구대상으로서의 공안만은 아니다. 공안은 다름 아닌 의심이면서 곧 나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제3단계에서는 여전히 공안은 공안이고 나는 나이다. 공안과 내가 별개이지만 이미 화두일념의 과정을 거친 공안이기 때문에 깨침의 공안이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의문의 대상으로서의 공안이 아니라 진리가 드러난 대상으로서의 공안이다. 이미 공안은 목적 또는 지향해야 할 대상, 곧 깨침으로서의 공안이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수단이 될 수가 없다. 공안 수행의 자체이고 나아가서 자기의 자신이다.

특히 공안 수행을 주창하는 간화선법에서는 모든 판단의 기준이 공안이 된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안이 전체를 대변하는 경우도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공안이 개별적으로 그리고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의 공안만 투과하면 온갖 공안이 해결된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한 낱낱의 공안을 별도로 투과해야 한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공안의 역사상에서 나타난 공안관이기도 하다.

공안이란 법령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기에 공안을 예로부터 전승해 내려온 법령과 같다는 의미에서 고칙공안(古則公案) 또는 고칙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칙이란 법칙을 의미하기 때문에 법령과 동일한 뜻이다. 법령은 국민의 생활을 보증하고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자칫 그것이 저촉되는 자가 있으면 단연코 그 조문에 따라 처분한다. 법령은 국가의 의지의 소재, 곧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공안이라는 용어를 선자의 깨침을 표현하는 말과 행위로 전용하여 진리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삼은 것은 타당한 사용법이다.

또한 법령이 아무리 완비되어 있어도 그 존재를 알고 그것을 지키는 국민의 관심이 없다면 공문(空文)에 불과할 것이다. 법령에는 그 대상인 국민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만약 국민에게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욕이 왕성하다면 잘 완비된 법령이 없어도 임시의 계약이라든가 무엇이라도 만들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공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완전하게 깨침의 경지를 표현한 공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관심을 지닌 종교적 요구가 깊은 사람이 없다면 거기에서 그 공안의 의의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에 반하여 종교적 요구가 깊은 사람이 있다면 고칙공안은 마치 굶주린 자가 밥을 만난 듯이, 그리고 목마른 자가 마치 물을 만난 듯이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고칙공안이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람은 우주 일체의 사물을 의심하고, 나아가서 모든 것에 대하여 공안과 같은 성질을 부여하여 마침내 깨침의 경지에 대한 매개 작용을 찾아내기에 이를 것이다.

그리하여 일단 깊은 종교적 의문을 품은 자에게는 일체의 사물, 곧 하늘에 떠 있는 일월성신도 하늘을 떠도는 구름도 새소리도 거위의 울음도 푸른 버드나무도 붉은 꽃도 모두가 회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어 의심의 투철에 대한 깊고 옅음은 있을지라도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깨침의 경지가 전개되어 간다.

그래서 일체는 공안이 지니고 있는 깨침의 경지에 대한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다른 측면에서 설하는 것이 편리할지도 모른다. 선자의 깨친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칙공안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깨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의 미세한 티끌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 행위의 어떠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본래 해탈의 경지에 있는 안심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당나라 시대에 형성된 조사선의 입장이다.

따라서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족된 채로 개개인에게 원만하게 성취되어 있어서 굳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언급할 필요가 없다.

조사들이 흔히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신에게는 한 법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든가, 그리고 일생 동안 노력하여 수행한다 해도 가히 얻을 만한 법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 등은 바로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석존께서 49년 동안 행한 설법도 평지풍파에 불과하고, 조사들의 천칠백 가지의 공안도 똥 묻은 휴지만큼도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선에 있어서는 일체가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들이 깊은 종교적 요구를 지닌 사람들에 대하여 그 진상을 누설하여 깨침의 경지로 향하는 매개 작용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주 간의 일체법은 광의의 공안이다. 선자가 선을 궁구하는 필요조건으로서 반드시 대신근(大信根)·대의문(大疑問)·대분지(大憤志) 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종교적 요구는 처음 현실 생활의 불안으로부터 일어나 점차 심화되고, 막연한 것으로부터 명료한 것으로 진행되어 나아가며, 그 사람의 성품과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종교의 영향에도 의존하는가 하면,

혹은 신의 사랑에 의하여 구제되기도 하고 불의 자비에 완전한 안정에 들기도 하지만, 신과 불을 의심하고 마침내는 신과 불을 의심하는 자신까지도 의심하여 선문에 들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어쨌든 그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요구를 선문으로 이끌어 들인 것은 바로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훌륭한 부처와 조사의 행위와 깨침을 얻은 사람들의 안심이라 할 수 있는 깨침의 경지를 표현한 공안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견문하여 확실하게 자기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음을 믿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을 결심이 있어야 비로소 실제로 선을 향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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