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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writer : 지봉 날짜 : 2014-09-11 (목) 14:49 hits : 782
    깨달음이란 명상의 목적이 마음의 안정이라면,선의 목적은 몸과 마음을 통한 지혜의 터득이다. 지혜의 터득은 지혜의 실현으로 곧 자신의 본래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을 깨닫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다.이전의 착각과 망상 속에서 살았던 자신을 잊고 자기 내면에 있는 진정한 자신에 눈 뜨는 행위이다.깨달음은 그 말 속에 이미 행위가 들어 있다.곧 깨우치는 것의 완성이다. 선은 그 자체에 선을 하다 선의 행위를 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행위가 선이다.선 수행에서는 불교의 다른 어느 수행보다도 깨달음을 강조한다.사실 불교 전반의 기저에는 깨달음으로 향하는 커다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부처님이 출가한 근본 동기부터가 그렇다. 그래서 출가는 곧 깨달음을 향한 첫걸음으로 간주되었다. 출가가 깨달음의 시작이라면 깨달음은 출가의 궁극이다.궁극은 다시 처음으로 통한다.그래서 깨달음은 출가의 본분사를 실현하는 기점이다.그것이 깨달음의 실현이다.깨달음이 자신의 실현이라면 깨달음의 실현은 깨달음의 사회화이다. 이것이야말로 선 수행이 비로소 안고 밖으로 삼투되는 내외명철 한 작용이 되는 이치이다.따라서 깨달음은 한낱 이론이요 철학에 불과하다. 깨달음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실현되고 보편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된다.깨달음은 청정과 평등을 그 속성과 작용으로 삼기 때문이다.청정은 집착이 없는 것이다. 한 부분에 머물러 있지 않기에 고착화되지 않는다.누구에게나 나타나기 때문에 보편적이다.보편적이기 때문에 어디에 치우침이 없어 푸른 하늘처럼 공평무사하고,삿된 생각을 떠나 있기에 청정하다.비교하고 따지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순진무구하다.그래서 깨달음은 항상 열려 있는 문이다.문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닫혀 있지만 그것을 자각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열려 있다. 선이 지향하는 깨달음 깨달음은 단순히 이치상으로 원리를 터득하는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행위와 마음으로 드러나고 작용되며 터득되는 행위이다. 마음으로만 터득되는 행위라면 명상이요 철학이다.작용으로만 터득되는 행위라면 기계이다.이와는 달리 선은 개별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서이 반드시 몸으로써 수행을 필요로 하는 의의이고,마음으로써 터득을 겨냥하는 가치이며,남에게 전해지는 작용으로써 교화를 지향하는 바탕이다. 선은 온 몸과 마음으로 깨닫는 수행이기 때문에 한평생 혹은 여러 생에 걸쳐 치열하게 자기를 안고 부단하게 정진하는 것을 예사로 여긴다. 더욱이 선은 마음의 터득을 중시한다.제 아무리 기계적으로 몸을 단련한다 한들 그 속에 담겨 있어야 할 내용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몸으로 평생 앉아 수행을 해도 인생과 자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때문에 혜가 달마 선사에게서 심법을 전수받아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마음의 깨달음에 있다.마음으로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몸의 단련을 통해서 마음이 가다듬어지면 그 마음으로 다시 몸을 추스르는 것이다.그래서 몸과 마음의 단련은 분리될 수 없다.몸이 단련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신심불이이기 때문이다.무엇이 먼저가 아니라 몸과 마음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작용한다. 몸이 마음의 그릇이라면 마음은 몸의 내용물이다.어느 것 하나라도 완전하지 않으면 제대로 가능할 수 없다.비유하면 마치 등과 등불의 관계와 같다. 등 없는 등불이 있을 수 없고 등불이 없는 등은 소용이 없다.등 있는 곳에 등불이 있고 등불 있는 곳에 또한 반드시 등이 있다. 또한 선의 깨달음은 남에게 전해지는 작용으로써 교화를 지향한다. 깨달음의 바탕에는 반드시 회향이 전제되어야 한다. 회향이 있기때문에 비로서 선의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이 깨달음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회향이 없다면 깨달음은 한낱 백일몽이고 과대망상일 뿐이다.선이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인 이상 깨달음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깨달음은 그 속성이 깨달음에 갇혀 있지 않고 역사와 지역에 두루 통하며 참여하는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보편성이 없는 깨달음은 자기 기만이고 자기 만족일 뿐이다.그래서 깨달음은 어디에나 두루 드러나 있고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깨달음의 대상 선에서의 깨달음 또한 불교의 목적과 다르지 않다.선의 깨달음 역시 무아. 연기.공을 실현하는 것이다.다만 선은 그것을 일상속에서 평상의 일 속에서 그대로 드러내어 역력히 보여준다. 깨달음의 맛이란 몸과 마음오로 함께 온다.누구에게나 전해지는 것이므로 어느 한 가지로 누구의 입맛에 맞게끔 규정할 수가 없다.수행을 통해 그 맛을 저절로 느끼게된다 느껴진 것은 이미 자기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 체험은 자신만이 할 수 있지만 자기에게 전해진 깨달음은 더 이상 자기만의 것이 아니다.그래서 깨달음은 평등하다.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깨달음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이다. 깨달음의 과정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떨림이요 확연한 체험이지만 깨달음의 작용은 그 깨달음을 모두가 향유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작용은 더 이상 수행의 굴레에 얽매여 있지 않다.그래서 임제 선사는 "이미 가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고 처한 상황마다 진리가 드러난다"라고 말했다.그대로가 깨달음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이다.이 경지쯤 이르고 보면 수행한다고 해서 깨달음이 오거나 수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깨달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깨달음은 수행과 불수행에 관계 없이 그것을 초월해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깨달음의 대상은 연기와 중도이다.연기와 중도는 텅 비어 있는 무아 ,공에 바탕을 둔다.깨달음의 대상이 공하기 때문에 깨달으면 공하여 집착이 없다.차별적인 분별상이 없다.차별적인 분별상이 없으므로 굳이 어떤 고정적인 실체로 소유하려는 구원이 필요 없다.그래서 구하는 것마다 밟아가는 곳마다 모두가 참으로 진리의 자리가 된다.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통해 이러한 중도 연기의 법칙을 머리가 아닌 삶으로 체화하는 수행이다.그리고 중도 연기를 바로 이 자리에서 깨달아 자유자재하게 살아가는데 그 목적이 있다.바로 깨달으면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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