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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백림사

writer : 최고관리자 날짜 : 2011-05-17 (화) 07:07 hits : 4902

2002년 4월 142호

 

업스테이트 뉴욕 백림사

 

김형근

 

백림사는 미동부에서는 처음으로 나무로 지은 한국 전통식 대웅전이 있는 절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백림사에는 불교인들의 발길이 자주 미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1시간 조금 더 걸리는 뉴져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백림사까지 차로 2시간이 더 걸리는 뉴욕시 한인타운인 플러싱에서도 백림사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은 백림사에 오니까 산의 기운도 느낄 수가 있고 기도처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뉴욕인근의 산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매달 법회가 있는 3번째 일요일은 평균 1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을 하여 산동네가 활기로 가득하다. 매주 셋째 일요일에 하는 법회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버스를 운영한다. 이 차는 플러싱 산수갑산 식당 앞에서 오전 8시 30분에, 뉴욕종합식품 오전 9시, 뉴져지 포트리 한일관 앞에서 9시 30분에 출발한다. 백림사 경내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계곡에 물이 흐르는 곳에서 살아 숨쉬는 자연을 느낄 수가 있고 숲 속 곳곳에 설치된 정자에서 도시생활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수도 있다. 여기에는 또 야생 칠면조와 사슴 떼를 자주 볼 수가 있다. 이곳에 눈이 많이 올 때는 이 야생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백림사 요사채로 내려오곤 한다. 어쨌든 이러한 자연환경 때문에 봄부터 가을까지 일요일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백림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국사람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미국인들도 백림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변화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백림사가 널리 알려지면서 또 대웅전 완성, 탑과 종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생긴 것이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앞으로 꾸준하게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백림사의 불사는 주지 혜성스님의 원력 그리고 혜성스님을 믿고

이를 잘 뒷받침한 신도들이 합심하여 이루어 낸 성과이다. 이제부터 혜성스님의 미국생활과 백림사 불사 과정을 혜성스님의 이야기를 토대로 기술하겠다.

혜성스님은 1962년 불국사로 출가하여 범어사에서 계를 받았다. 그 후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를 하고 통도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즉 한국의 불교전통에 따라서 공부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난 후 통도사에서 당시에 명성이 자자한 경봉스님을 모시고 2년 동안 지내면서 2차례의 안거를 마쳤다. 당시에 스님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도들도 경봉스님을 따랐는데 현재 혜성스님이 주지로 있는 부산 금강사 창건주 보살도 경봉스님을 오랫동안 모시던 신도였다. 이 보살이 부산에 금강사 절 세우는 불사를 하자 경봉스님께서 혜성스님에게 “금강사 불사를 도와주라"고 하여 혜성스님이 부산에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산에 나온 스님은 이 작업이 끝나자 1970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하여 1974년에 졸업하고, 그후 대학원은 부산대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29세였다. 즉 혜성스님은 30세 전에 전통불교교육을 다 마치고 또 대학교와 대학원까지 마친 것이다. 당시 스님으로서는 드물게 전통교육과 현대교육을 다 마친 것이다.

그리고 경봉스님이라는 당대의 큰스님을 모시고 2년 동안 스님으로서의 소양을 쌓은 것이다. 이제 스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도를 닦는 일이고 또 하나의 길은 학문을 더 하여 박사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길이었다. 한국불교의 엘리트라 볼 수 있는 젊은 혜성스님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은사 서경보스님에게 찾아가 미국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이러한 혜성스님에게 서경보스님은 대혜라는 미국인 제자에게 찾아가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님은 서경보스님 소개로 1978년 4월에 문화비자(Cultural Exchange)를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혜성스님의 미국 도착은 1964년 서경보스님의 방미를 시작으로 69년도의 삼우스님, 한국사 고성스님, 박성배교수, 이한상 거사, 1972년 숭산스님, 1973년 정정달법사, 1974년 법안스님 1975,년 도안스님, 대원스님, 1978년 법춘스님 등 1980년대 이전에 들어온 한국불교 개척자의 대열에 마지막으로 합류하였다. 이들이 미주한국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으로 이들에 의하여 미주한국불교계의 근간이 이루어졌다.

혜성스님이 큰 기대를 하고 막상 샌프란시스코에 와 보니 대혜스님은 혜성스님의 기대와는 달리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여기서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스님은 이곳에서 며칠 있다가 한국에서부터 알던 청정심보살에게 연락을 하였다. 청정심보살은 혜성스님과 백림사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보살인데 당시 미시간으로 이민을 와 살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스님은 청정심보살이 살고 있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로 갔다. 디트로이트에는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이태근씨를 비롯하여 절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사람들 중 이태근씨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당시가 박정희 정권 말기인 관계로 민권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혜성스님은 이 모임을 토대로 가정법회형식으로 모임을 하였지만 이 사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 모임을 해산시키고 청정심보살과 스님 위주로 다시 모임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79년에 선국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 신도들이 모금을 하여 집을 사 절을 만든 것이다. 그 후 스님은 1980년 디트로이트에서 멀리 떨어진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에 법흥사라는 절을 만들어 이 두 절을 오가면서 포교를 하였다. 혜성스님은 디트로이트 웨인대학교에 잠시 적을 두기도 하면서 이 지역에서 1983년까지 5년 동안 있었다. 그 후 스님은 스님이 초청한 도만스님에게 선국사를 인수인계 해 주고 한국에 나갔다. 한국에 나가 여기 저기를 다니다가 남해 보리암 뒤 용문사 주지 성진스님에게 다니러 갔다. 도반인 성진스님과 미국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혜성스님은 성진스님에게 그간 미국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미국에 오게 되면 같이 협력하여 미국에서 포교를 해보자고 하였다. 용문사는 오래된 고찰인데 성진스님은 법당수리 중 발견된 사리 3과를 혜성스님에게 주었다. 이 사리가 혜성스님이 백림사 불사를 하는데 큰 동기를 부여하였다.

혜성스님은 미국에 와서 도만스님, 성진스님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있던 도만스님은 곧바로 미국에 들어왔지만 성진스님은 들어오지 못했다. 혜성스님은 도만스님에게 디트로이트 선국사를 클리브랜드 법흥사는 비구니계의 원로인 해운스님에게 인계를 해주고 성진스님에게 얻은 사리를 명당에 묻고 미국불교계에 기념이 될 만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뉴욕에 오게 되었다.

“중국불교사의 불교전래사를 보면 부처님의 사리를 명당에 묻고 보궁을 만들고 불교경전을 들여온 것이 후에 불교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고, 한국불교도자장스님이 중국에 가서 부처님 사리를 얻어 5개 보궁에 묻고 불교장래를 걱정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미국불교도 이런 차원에서 이것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 라고 혜성스님은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해동 비구 혜성은 사리를 미국에 모셔 왔으니 이 사리를 미국의 명당에 묻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명당을 찾기 위해 농장만 소개하는 책을 구해 미국 동부일원을 계속 살폈다. 이렇게 1년 6개월 정도 살피던 중에 캐스킬에 있는 일본절 Dai Bosatsu Zendo 주지스님을 방문하여 며칠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스님이“이 케스킬이 참 좋은 곳이다. 나는 젊은 나이인 29살에 이곳에 왔다. 이곳에는 여러 나라의 정신문화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은거해 살고 있으니 스님도 이 곳에 오라” 고 했다. 그리고 이 스님이 인디언벨리를 소개했다. 이 곳이 케스킬 북쪽지역에서는 가장 깊은 곳이지만 뉴욕시내와 너무 멀고 또 너무 깊어서 그 곳은 포기하였다. 그 후 계속 케스컬 지역을 6개월 정도 알아본 후 부동산을 통해서 1984년도에 현재의 백림사 터를 구했다.

이 터는 현재 180에이커지만 처음에는 폴란드 사람의 소유지 50에이커를 샀다. 이 터에는 현재 요사채와 종무소로 쓰고 있는 건물, 마구간이었으나 개조하여 지하는 식당으로 1 층은 법당으로 쓰다가 지금은 없어진 건물, 그리고 보살들이 기도하면서 머무는 요사채 등 3개의 건물이 있었다. 그 다음에 현재 납골당 앞쪽의 땅을 길을 내기 위해 매입하였고 , 현재 탑을 모신 터를 그 나중에 샀다.

절터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좀더 이야기 해보겠다.

혜성스님이 이 곳에 가람을 건설할 구상을 하면서 대웅전 자리, 사찰 문 등을 정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연구를 하였다. 언제가 혜성스님은 수월스님을 찾아갔다. 이 노스님은 현재 부산 구포 수월선원과 지리산 정각선원 조실로 있는데 80이 넘은 스님이다. 이 스님이 풍수에 조예가 깊어 많은 스님들에게 절터를 잡아 주고 가람배치의 자문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혜성스님이 이 스님을 찾아 뵙고 법당배치를 물으니“법당은 정남향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정동으로 내면 이것은 영구적인 절이 된다” 고 했다. 이 말대로 하면 백림사 문은 전에 사용했던 현재 납골당쪽이다. 혜성스님은 앞으로 이 곳을 정문으로 사용하고 현재 문은 후문으로 이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천문에 밝은 사람이 백림사를 방문하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방풍유수 防風流水 -바람을 막고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사람들이 살면 이곳이 좋은 장소이다. 이 장소 앞에 서쪽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면 이곳이 명당이고 영원토록 발전한다.” 라고 하는데 백림사는 여기에 딱 맞는 곳이라고 했다.

백림사 터는 사냥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또 마구간이 있었다. 이 곳을 사고 절을 시작하기 전에 세를 주면서 2년 정도 살았다. 스님이 이 곳에 터전을 마련한 후 우연히도 뉴욕에서 발행하는 일간신문에서 부동산 투자에 관한 기사를 연재하면서 ‘이 지역이 한인 커뮤니티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곳 중의 하나’ 라고 소개했다. 즉 이 지역에 스님도 살고 있는데 환경이 좋고 땅값이 싸며 뉴욕시에서도 가까운 지역이라고 상세하게 보도했다. 이 기사가 나간 후 한인들이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절 이름도 없이 2년 정도 살다가 1986년 백림사(白林孝)라고 간판을 붙였다. 어느 날 아침 해성스님이 이곳에서 겨울을 나면서 보니까 주변의 나무들이 하얀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절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옛부터 하얀색을 좋아하는 우리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하며 서양인을 백인이라고 하니 하얀 것을 좋아하는 우리민족이나 서양인들이 모여 가람을 이루고 살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백림사” 라는 이름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1986년에 간판을 내건 백림사는 철로 주조된 조그마한 불상을 모셨다. 이 부처님은 혜성스님이 평소 모시던 원불이었다. 그러나 이 부처님은 1 년 후에는 다른 부처님으로 대체되었다. 1987년에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에 있던 해운스님과 그 상좌들이 그 곳은 너무 시골이어서 뉴욕지역으로 옮기고 싶다고 하여 우선 스님들만 먼저 뉴욕지역으로 이동하던 중 그 제자들이 한국에 가서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귀국해 버리는 바람에 법흥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종정을 지낸 고암스님이 점안하였던 법흥사 불상과 탱화를 청정심보살이 백림사로 모시고 왔다. 그래서 백림사는 이 불상과 탱화로 그런 대로 절의 모습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혜성스님은 사리탑을 모실 명당에 대한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이 사리탑을 세우는 일이 미래 미국불교를 위해 기념비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도량을 건설할 땅을 확보한 혜성스님에게 대웅전 불사 기회가 왔다. 미시간에서 알게 된 유정심화 신도 자제들이 미시간 앤아버에서 학교를 마치고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어 그 가족들이 1985년도에 뉴져지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청정심보살 가족도 버지니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혜성스님이 뉴욕 케스킬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한데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한국의 전통 사찰을 만들어 보자고 발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정심보살과 유정심화 보살이 의욕을 내어 본국 부산에 갔다. 혜성스님은 이들에게 부산 금강사로 가 취지를 잘 설명해 보라고 했다. 이들이 부산의 금강사로 가 스님, 신도들과 협의하니까 금강사에서도 적극 후원하겠다는 말을 듣고 유정심화 보살이 사찰 자재 값은 내가 보시하겠다고 하였고, 금강사에서는 목재를 다듬는 장소를 제공하고 일꾼들의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부산 금강사에서 1987년부터 법당 건평 60평 밖 7포 안 9포짜기 대웅전을 짓기 위한 나무 다듬는 작업을 하였다. 혜성스님은 이들의 인건비를 마련하기 위해 맨해튼 18가 8에비뉴에서 야채가게를 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손수 가게에 나와 가게 일을 하면서 론을 만들었다. 목재를 다듬는 작업이 4개월 정도 소요되었다. 이 목재들을 가져다 그대로 조립만 하면 건물이 될 수 있었다. 기둥과 대들보는 미국에서 구하기로 하였다. 혜성스님은 87년도에 건물허가를 신청하였고 대웅전을 짓기 위해 그해 목수가 본국에서 도착하였다. 백림사에서는 커다란 원목을 사다가 기둥을 다듬으면서 허가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국건축과 한국전통건물의 건축기법과 설계 차이 등에서 기인 한 것이다. 본국에서 대웅전 설계를 해 가지고 왔는데 이 설계도면이 미국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것으로 미국 건축과 달리 건축 모양만 있지 상세한 설명이 없었다. 즉 대웅전 설계도에 하중에 관한 설명이라든지 빔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런 설명이 없는 것이다. 백림사에서는 본국의 문공부 측에 연락을 하여 자료를 갖다 주어도 미국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설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타운에서는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이 비슷한 사례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국사찰로 꼽히는 타코마 서미사도 마찬가지였다. 서미사의 경우는 건축허가 담당자가 본국으로 가 여러 사찰을 보고 설계도 없이 지은 건물에서 몇 백년을 안전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고 난 후 허가를 내 주었다고 한다. 기둥을 비롯하여 맞추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허가가 나오지 않아 대웅전을 짓기 위하여 온 목수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혜성스님은 이 목수를 서미사 일변스님에게 보내면서 이런 목수가 왔을 때 스님도 절하나 마련하십시오. 하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짓지 못하겠다던 일면스님은 이런 연유로 백림사 도량을 짓기 위해 뉴욕에 온 도편수 이춘성씨와 인연이 되어 통도사 지원으로 서미사 대웅전을 백림사 보다 먼저 시멘트가 아닌 나무로 한국전통식으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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